Luda
끔찍하고도 아름다운_<채식주의자>_한강 본문
이번에 소개할 책은 한강의 '채식주의자'이다. 채식주의자는 세편의 중편소설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중 첫 번째 이야기를 여는 소설은 표제작인 '채식주의자'이다. 이후로는 2005년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몽고반점'과 '나무 불꽃'으로 구성된 소설이다. 따로따로 쓰인 소설들이었지만 이 소설들이 하나로 뭉치면서 한가 작가가 몇 년 전부터 해오고 싶었던 말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알 수 있는 한 권의 장편소설이 되었다.
'채식주의자'는 제목 그대로 육식을 거부하는 영혜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소설이다. 이 책을 읽다보면 영혜의 과거 비슷한 장면이 짧게 나온다. 사실 '영혜'라는 인물은 한강 작가가 십여 년 전에 발표한 단편 '내 여자의 열매'에서 식물적 상상력이 극대화 한 인물이라고 한다. 그 단편 속에서 희망 없는 삶을 체념하며 베란다에서 '나무'가 되어가는 주인공을 바라보던 어린 시절의 영혜는 그때의 기억 때문인지 '나무'가 되고 싶어 한다.
영혜의 가족은 이 책에서 자꾸만 무너져 내려간다. 그냥 한 마을의 평범한 집인줄만 알았는데 모래로 쌓은 성처럼 우수수 부서져버린다. 쌓아 올리려고 해도 자꾸만 쓸려내려 간다.
이 소설에서 '꿈'이라는 요소가 큰 역할을 준다. 이것은 영혜의 기억을 상기시키는 역할로 다가오기도 하고 채식주의자가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한강 작가는 이러한 꿈을 자신만의 아름다운 문체로 써 내려갔다. 꿈을 풀어가는 짧은 산문이 끝나고 나는 금방이라도 꿈에서 깬 것만 같은 여운을 느꼈다. 이것은 글을 쓰는 작가라면 가지고 있어야 하는 자신의 글에 대한 몰입력이다. 얼마나 독자를 현혹시킬 수 있는지. 한강 작가는 그것을 자신만의 개성으로 가지고 있다.
누군가에게는 눈살이 찌푸려질 수 있다. 너무나도 폭력적이고 경악스러워서. 끔찍해서. 더 이상 페이지를 넘기기 싫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내용만 바라보는게 아니라. 한강 작가의 섬세하고도 아름다운 문장을 알아차리길 바란다. 이런 끔찍한 내용을 아름답게 풀어나가는. 한강 작가가 이 이야기의 끝에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를 꼭 볼 수 있기를 바란다.
때문에 나는 여러분들이 이 책에 흥미를 가지도록 마지막으로 한강 작가의 아름다운 문장들을 남기며 책 소개를 끝내겠다.
내가 믿는 건 내 가슴뿐이야. 난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론 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 손도, 발도, 이빨과 세치 혀도, 시선마저도, 무엇이든 죽이고 해칠 수 있는 무기잖아. 하지만 가슴은 아니야. 이 둥근 가슴이 있는 한 난 괜찮아. 아직 괜찮은 거야. 그런데 왜 자꾸만 가슴이 여위는 거지. 이젠 더이상 둥글지도 않아. 왜지. 왜 나는 이렇게 말라가는 거지. 무엇을 찌르려고 이렇게 날카로워지는 거지.
그것은 구석구석 일체의 군더더기가 제거된 육체였다. 그는 그런 육체를, 육체만으로 그토록 많은 말을 하는 육체를 처음 보았다.
나는 어두웠다고 그는 느낄 때가 있었다. 그는 어두웠다. 어두운 곳에 그가 있었다. 그가 이즈음 경험하는 색채들이 부재했던 그 흑백의 세계는 아름답고 고즈넉했으나 그로서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곳이었다. 그 잔잔한 평화가 주는 행복을 그는 잃은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상실감 따위를 느낄 수 없었다. 지금 이 순간 이 격렬한 세계가 주는 자극과 고통을 견디기에도 그의 에너지는 벅찼다.
막을 수 없었을까. 두고두고 그녀는 의문했다. 그날 아버지의 손을 막을 수 없었을까. 영혜의 칼을 막을 수 없었을까. 남편이 피 흘리는 영혜를 업고 병원까지 달려간 것을 막을 수 없었을까. 정신병원에서 돌아온 영혜를 제부가 냉정히 버린 것을 말릴 수 없었을까. 그리고 남편이 영혜에게 저지른 일을, 이제는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을, 값싼 추문이 되어버린 그 일을 돌이킬 수 없었을까. 그렇게 모든 것이-그녀를 둘러싼 모든 사람의 삶이 모래산처럼 허물어져버린 것을, 막을 수 없었을까.
꿈에 말이야. 내가 물구나무서 있었는데..... 내 몸에서 잎사귀가 자라고, 내 손에서 뿌리가 돋아서...... 땅속으로 파고들었어. 끝없이, 끝없이.... 사타구니에서 꽃이 피어나려고 해서 다리를 벌렸는데, 활짝 벌렸는데.....
어리석고 캄캄했던 어느날에, 버스를 기다리다 무심코 가로수 밑동에 손을 짚은 적이 있다. 축축한 나무껍질의 감촉이 차가운 불처럼 손바닥을 태웠다. 가슴이 얼음처럼, 수없는 금을 그으며 갈라졌다. 살아 있는 것과 살아 있는 것이 만났다는 것을, 이제 손을 떼고 더 걸어가야 한다는 것을, 어떻게도 그 순간 부인할 길이 없었다.
추천평-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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