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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da
연말상영 손을 잡으면 눈이 녹아. 극장에서는 그래. 스크린 향이 있다는 걸 아니. 기묘한 냄새야. 우린 쿠션 달린 의자가 아니라 계단에 꿇어앉아 있는 것 같아. 한 칸씩 낮아지거나 높아지면서. 누군가는 나의 정수리를 내려다보고 아래 있는 머리들을 볼링공처럼 보이네. 밀어내면 멀리 굴러가버리는 것들. 엔딩크레디트가 끝없이 올라가는 티셔츠를 입고 싶어. 영사기의 불빛을 내 목젖과 눈꺼풀 위까지 쐬어도 좋다. 이상하지. 불 꺼진 자리에서 너의 이름을 읽는 일은 왜 언제나 어려울까. 너는 어두울수록 맑아지는 게 있다고 했지만 나는 컴컴한 공간에서 매번 어리숙했다. 숨쉬는 걸 잊어버려서, 나중에는 귓가에 다른 사람의 숨소리가 닿는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나는 어둠 속에 하얗게 떠오른 너의 얼굴을 볼 수가 있었다. ..
카프카의 잠 그는 야근을 하고 있었다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고 라고 쓰자 그는 잠이 쏟아졌다 그가 책상 위에 쌓인 서류 더미를 뒤적이고 있을 때 누군가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똑똑 이 야심한 시각에 사무실을 방문한 사람이 누굴까 그는 고개를 갸웃하며 걸어가 문을 열어주려 했으나 문은 열리지 않았다 굳게 잠긴 문을 열어보려 애쓰다 이 문은 밖에서 열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곤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유심히 문을 바라보던 그는 조심스럽게 두드려보았다 똑똑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다시 똑똑 그는 갇힌 것이다 아무도 없는 밤에 눈 내리는 사무실에 어마어마한 눈이 쏟아지고 쌓이고 있는데 건물이 눈 속에 파묻힐 것 같은데 그는 나가지도 못하고 그를 도와주러 올 이 하나 없는 것이다 저 눈을 멈추게도 할 수 없..
부담 동생의 마음이 이해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나도 양아치였으니까. 그렇지만 나는 깨달아버린 것이다. 학교에 가지 않는 양아치보다는 학교에 가는 양아치가 더 멋있다는 사실을. 부모가 죽고 세 달이 흐르자, 숙제가 밀리면 그 숙제는 하지 않는다. 그것이 형의 방식. 형이라서 라면을 먹어, 역기도 들고, 찬송하고, 낮잠을 때리지. 형이라서, 형이라서 배탈이 났어요. 나는 학교에 늦게 간다. 하고 싶다면 너도 형을 해. 그러나 네가 형을 해도. 네가 죽으면 내 책임이지. 학교에서, 나는 농구하는 애. 담배 피우는 애. 의자로 후배를 때린 선배. 아버지가 엄마보다 늦게 죽을 줄 알았어. 자주 앓는 사람이 오래 사는 법이니까. 부모가 동시에 죽고, 이제 누가 화장실 청소를 하나? 형이라서 배탈이 났어요. 이십..
방관 부모가 죽고 세 달이 흐르자 형제는 화장실 청소를 할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샤워를 할 때마다 바닥에 오줌을 누는 동생, 치약 거품을 천장에 뱉는 형, 바닥은 노란색 천장엔 파란 얼룩, 형제는 일주일 전부터 소원해지기 시작했다. 형은 매일 아침 운동화를 닦고 테니스를 치러 나가네. 아마 역기도 서른 번씩 드는 모양이야. 형이 끈을 다 묶고 현관을 나설 때까지 나는 일부러 코 고는 소리를 낸다. 형, 잘난 형, 형은 기도문도 여럿 암송할 줄 알지? 형의 중얼거림은 언제나 새하얀 한 켤레 신비. 강해지고 싶어서, 나는 오늘도 학교에 가지 않았다. 성모상에 걸린 형의 묵주를 팔목에 치렁치렁 감고 방 안에 드러누우면. 어쩐지 생각이 많아지는 것 같아. 몸속 어딘가에서 힘이 솟는 것 같아. 커튼을 치..
개 먹을것이 아니라는 걸 알아채자 즉시 개는 초점에서 내 얼굴을 지우고 내 몸 뒤 끝없이 먼 곳을 철망과 담 산과 구름과 하늘 먹을것이 아닌 모든 것들을 뚫고 아득하고 깊은 곳을 바라보았다 세상은 너무나도 고요하고 깨끗하다 고막이 제거된 개의 눈 속에서 먹은 것은 남김없이 영양분이 된 영양분은 남김없이 살이 된 살은 다시 무언가 먹을 수 있다는 희망이 된 개의 눈 속에서 生老病死를 넘어 어디에선가 먹을것을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은 개의 눈 속에서
호랑이 길고 느린 하품과 게으른 표정 속에 숨어 있는 눈 풀잎을 스치는 바람과 발자국을 빈틈없이 잡아내는 귀 코앞을 지나가는 먹이를 보고도 호랑이는 움직이지 않는다 위장을 둘러싼 잠을 무거울수록 기분좋게 출렁거린다 정글은 잠의 수면 아래 굴절되어 푸른 꿈이 되어 있다 근육과 발톱을 부드럽게 덮고 있는 털은 줄무늬 굵은 결을 따라 들판으로 넓게 뻗어 있다 푹신한 털 위에서 뒹굴며 노는 크고 작은 먹이들 넓은 잎사귀를 흔들며 넘실거리는 밀림 그러나 멀지 않아 텅 빈 위장은 졸린 눈에서 광채를 발산시키리라 다리는 무거운 몸을 일으켜 어슬렁어슬렁 걷기 시작하리라 느린 걸음은 잔잔한 털 속에 굵은 뼈의 움직임을 가린 채 한번에 모아야 할 힘의 짧은 위치를 가늠하리라 빠른 다리와 예민한 더듬이를 뻣뻣하고 둔하게 만..
쥐 구멍의 어둠 속에 정적의 숨죽임 뒤에 불안은 두근거리고 있다 사람이나 고양이의 잠을 깨울 가볍고 요란한 소리들은 깡통 속에 양동이 속에 대야 속에 항상 숨어 있다 어둠은 편안하고 안전하지만 굶주림이 있는 곳 몽둥이와 덫이 있는 대낮을 지나 번득이는 눈과 의심 많은 귀를 지나 주린 위장을 끌어당기는 냄새를 향하여 걸음은 공기를 밟듯 나아간다 꾸역꾸역 굶주림 속으로 들어오는 비누 조각 비닐봉지 향기로운 쥐약이 붙어 있는 밥알들 거품을 물고 떨며 죽을 때까지 그칠 줄 모르는 아아 황홀하고 불안한 식욕
나무도마 고깃덩어리의 피를 빨아먹으면 和色이 돌았다 너의 낯짝 싱싱한 야채의 숨결도 스미던 몸 그때마다 칼날에 탁탁 피와 숨결은 절단났다 식육점 앞, 아무것도 걸친 것 없이 버려진 맨몸 넓적다리 뼈다귀처럼 개들에게 물어뜯기는 아직도 상처받을 수 있는 쓸모 있는 몸, 그러나 몸 깊은 곳 상처의 냄새마저 이제 너를 떠난다 그것은 너의 세월, 혹은 ㄴ영혼, 기억들; 토막난 죽은 몸들에게 짓눌려 피거품을 물던 너는 안 죽을 만큼의 상처가 고통스러웠다 간혹 매운 몸들이 으깨어지고 비릿한 심장의 파닥거림이 너의 몸으로 전해져도 눈물 흘릴 구멍 하나 없었다 상처 많은 너의 몸 딱딱하게 막혔다 꼭 무엇에 굶주린 듯 너의 몸 가장자리가 자꾸 움푹 패어갔다 그래서 예리한 칼날이 무력해진 것이다 쉽게 토막나고 다져지던 고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