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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da
등대가 있는 곳 위층에서 터진 물소리가 점점 커진다 그는 또 여자의 머리채를 잡고 노를 젓는다 여자의 몸이 방바닥을 휘젓는 소리 그릇들이 난파되는 소리 비명 소리 속으로 콸콸 물이 쏟아지고 있는 중이다 지난 오후 내내 베란다에 앉아 있던 여자의 흐느낌은 물소리였다 이내 길고 긴 골짜기가 되었다 붉은 화분이 하나 둘 흘러갔고 앞날을 모르고 웃고 있는 환한 사진들이 흘러갔다 불붙는 편지는 뒷걸음질치며 느리게 흘러갔고 우수수 머리카락이 흘러갈 때 멀리 먼바다의 문어대가리처럼 지던 태양은 먹물 같은 어둠을 갈겨버렸다 그때 첨벙첨벙 어둠을 밟으며 장화 신은 그가 온 것이다 늘 바다 비린내가 나는 그의 몸, 그는 거친 뱃사람인 거이다 그러나 한 번도 갑판에 올라본 적 없는 선장 토막나고 썩은 물고기들만 가득 싣고 ..
얼굴의 물 그는 안에 있고 안이 좋고 그러나 안으로 빛이 들면 안개가 새 나간다는 심상이 생겨나고 그러니 밖으로 나가자 비는 내리고 비는 믿음이 가고 모든 맥락을 끊고 있어서 좋다고 그는 되뇌고 있다 그러면서 걸어가므로 젖은 얼굴이 보이고 젖은 눈이 보이고 비가 오면 사람들은 눈부터 젖어 든다고 그는 말하게 되고 그러자 그건 아무 말도 아닌 것 같아서 계속 드나들게 된다 얼굴의 물 안으로 얼굴의 물 밖으로 비는 계속 내리고 물은 차오르고 얼굴은 씻겨 나가 이제 보이지 않고
망상 해수욕장 서로의 얼굴에 모래성을 쌓는 해변의 연인. 파도는 전화벨처럼 밀려와 발자국을 밀어냈다. 나는 내 발자국으로부터 구명당하고 싶어 양손을 흔들었다. 파도를 걸어온 우리. 여전히 망망대해의 스티로폼보다 못한 우리. 그는 고무 튜브라서. 나는 불어도 불어도 부풀지 않는 튜브라서 우리는 가라앉지도 못했다. 우린 알록달록한 거대한 우산 아래 누워 햇빛을 피했다. 그가 쓰레기를 모아 기타를 퉁기며 쓰레기만도 못한 노래를 부르는 동안 나는 여전히 주둥이부터 꽂힌 빈 병처럼 그렇게 널브러져 있었다. 해변이란 모래알들이 알알이 모여 영원히 하나가 되지 못하는 곳. 손에 손잡고 아이엠그라운드를 외치면서도 이름은 끝까지 모르는 곳. 나는 망상이 신다 버린 슬리퍼 한 짝과 다정히 걸었다. 방차제 우뚝 솟은 자리부..
한때의 섬 밤마다 뒤척이는 소리를 듣는다 우리 집 침대는 외롭다 거대한 캔버스 죽은 맨드라미와 모빌 부싯돌처럼 서로의 머리가 깨지는 줄도 모르고 낡은 성냥갑에 갇혀 있는 자작나무 불길한 우리는 침묵했다 숲은 겨우내 거울 안에서 우거지고 있었다 반짝이는 야광별 순한 처마에 흐트러지는 빗방울 마주 본 등은 익숙하고 무서웠다 나는 쓸모없는 그림이 되었다
동거 내가 태어났는데 어쩌다 너도 태어났다. 하나에서 둘. 우리는 비좁은 유모차에 구겨 앉는다. 우리는 같은 고복을, 남자를, 방을 쓴다. 언니, 의사 선생님이 나 하고 싶은 대로 하래. 그러니까 언니, 나 이제 너라고 부를래. 사랑하니까 너라고 부를래. 사실 너 같은 건 언니도 아니지. 동생은 식칼로 사과를 깎으면서 말한다. 마지막 사과니까 남기면 죽어. 동생은 나를 향해 식칼을 들고, 사과를 깎는다. 바득바득 사과를 먹는다. 나는 동생의 팔목을 대신 그어 준다. 넌 배 속에 있을 때 무덤처럼 잠만 잤대. 한 번 더 동생의 팔목을 그었다. 자장자장. 넌 잘 때가 제일 예뻐. 동생을 뒤집어 놓고 재운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주고 재운다. 비좁다 비좁다 밤이. 하나에서 둘. 하나에서 둘.
우리 바깥의 우리 우리는 서로의 뒤쪽에 있으려 한다 등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그러는 것은 아니고 다만 등을 보고 있으려고 표정을 숨기며 곁에는 있고 싶어서 옆자리는 비어 있고 뒤에 서서 동그랗고 까만 팔꿈치를 쳐다보면서 그림자 속에 숨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면서 등 뒤에서 험담이 들려올 때 꼭 듣고 싶었던 말이었는데 제대로 듣지 못하면서 -말하는 것 좀 봐 -말하지 못하는 것 좀 봐 단 하나의 사건에는 모두의 죄들이 한꺼번에 발각되는 순간이 온다 -이제 전부가 죄인이 되었는데 앞으로 벌은 누구에게 받나 추위 때문에 소름이 돋는 건지 소름이 돋기 대문에 춥다고 느끼는 건지 (내가 알던 나에 대한 (내가 알던 나에 대한 (내가 알던 너에 대한) 내가 알던 나에 대한) 내가 알던 나에 대한) 우리 바깥에는 우..
냉장고의 나날들 보송보송한 분홍 곰팡이가 드넓게 만개한 그날의 밥상머리에 뽀얀 포동포동 살이 오른 구더기가 밥그릇에 그득히 담겨 있었지 사내는 그 밥을 다 먹었네 나는 창가에 서서 휘파람을 불며 화분에 물을 주었네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며 말을 하고 싶지 않은 소리를 내던 사내가 윤기가 반들반들한 흑빛 구정물이 고인 국그릇에 얼굴을 파묻고 쩌업쩝 쩌어업쩝 소리를 드높였을 때에 신발장을 활짝 열어 하얀 운동화를 꺼낸 다음 타일 바닥에 탁, 하고 내려놓고 나는 두 발을 넣었네 문 닫히는 멜로디가 경쾌하게 울려퍼졌지
내 방에서 하는 연설 당신은 왜 그런 배역을 맡았습니까 직장인의 첫인상은 어떻게 만들어야 합니까 한순간도 위험하지 않은 인상착의를 소화하고서 단 한 번도 위험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했군요 암암리 암암리 참담합니까 전혀 참담하지 않습니까 참담합니까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그랬던 적도 있고 안 그랬던 적도 있습니다 사실이거나 음해이거나 광산이거나 공장이거나 낙태 혹은 패혈증 선생님의 편견에 부합되지 않았다고 해서 왜 그렇게까지 당황하셨습니까 실업수당이거나 자업자득이거나 바르는 약이거나 먹는 약이거나 나름의 이유는 있었겠지요 각자의 선택에 달렸겠지요 드라마입니까 프로파간다입니까 누구 편에 서겠습니까 단결 또는 분열 승리 혹은 세력 여러분께 또 묻겠습니다 조용한 힘만을 미미한 일들을 욕실과 주방과 유언지를 기억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