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문학과지성사 (11)
Luda
카프카의 잠 그는 야근을 하고 있었다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고 라고 쓰자 그는 잠이 쏟아졌다 그가 책상 위에 쌓인 서류 더미를 뒤적이고 있을 때 누군가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똑똑 이 야심한 시각에 사무실을 방문한 사람이 누굴까 그는 고개를 갸웃하며 걸어가 문을 열어주려 했으나 문은 열리지 않았다 굳게 잠긴 문을 열어보려 애쓰다 이 문은 밖에서 열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곤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유심히 문을 바라보던 그는 조심스럽게 두드려보았다 똑똑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다시 똑똑 그는 갇힌 것이다 아무도 없는 밤에 눈 내리는 사무실에 어마어마한 눈이 쏟아지고 쌓이고 있는데 건물이 눈 속에 파묻힐 것 같은데 그는 나가지도 못하고 그를 도와주러 올 이 하나 없는 것이다 저 눈을 멈추게도 할 수 없..
나의 자랑 이랑 넌 기억의 천재니까 기억할 수도 있겠지. 네가 그때 왜 울었는지. 콧물을 책상 위에 뚝뚝 흘리며, 막 태어난 것처럼 너는 울잖아. 분노에 떨면서 겁에 질려서. 일을 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네가 일을 할 줄 안다는 것이. 이상하게 생각되는 날이면, 세상은 자주 이상하고 아름다운 사투리 같고. 그래서 우리는 자주 웃는데. 그날 너는 우는 것을 선택하였지. 네가 사귀던 애는 문밖으로 나가버리고. 나는 방 안을 서성거리며 내가 네 남편이었으면 하고 바랐지. 뒤에서 안아도 놀라지 않게, 내 두 팔이 너를 안심시키지 못할 것을 달 알면서도 벽에는 네가 그린 그림들이 붙어 있고 바구니엔 네가 만든 천가방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는 좁은 방 안에서, 네가 만든 노래들을 속으로 불러보면서. 세상에 노래란..
미안의 제국 솔잎이 연두색으로 보이기 시작하면 죽을 때가 다 된 거래. 아버지 나 죽는 거야? 왕자가 울었다. 짐이 미안하구나. 신하들은 반바지를 입지. 화가 난 짐을 향해 무릎을 꿇어. 머리를 풀고 엎드려서 얼굴을 감추지. 짐이 먼저 서러웠는데. 왕이 우는 신하들을 일으켜 쓰다듬는다. 미안하구나. 아버지는 그 말을 어디서 배웠어요. 짐은 본래 사과를 받는 사람. 짐의 무릎은 깨끗하단다. 그런데 왜 손바닥에서 삶은 달걀 냄새가 나죠? 화가 나면 방문을 잠가버리렴. 얼굴이 시뻘게진 네 앞에 그들이 무릎을 꿇고 기어 온다면. 어쩐지 미안할 거야. 반바지들이 몰려온다면. 머리채를 잡고 피투성이를 만들겠어요. 마음껏 계획하렴. 허리를 편 내시처럼. 너는 아직 당당해도 좋을 때란다. 일어서시오. 그들은 해맑게 상..
화장실이 붙인 별명 무엇이든 만들 수 있으니까. 나는 시멘트를 가능성이라고 불렀다. 수건걸이를 설치할 때. 가능성에 못이 박혔다. 이봐, 가능성 기분이 어떤가? 가능성엔 기분이 없었다. 바닥에 고인 물 때문에 미끄러지는 일이 없도록. 타일은 간격을 원했다. 물은 간격을 타고 하수구로 간다. 천천히. 동생이 샤워를 하면서 오줌을 눈다. 변수로군. 나는 동생을 변수라고 불렀다. 이봐, 간격에게 사과를 하지 그래? 변수는 배신이었다. 엄마는 변기에 앉아 거실을 바라보았다. 왜 문을 열고 싸는 거야? 텔레비전이 하나잖아. 아빠는 거실이었다. 부모가 죽자. 변수에게 거실은 학교였다. 변수는 급식도 먹지 않고 하루 종일 누워 있었다. 형이 학교에서 돌아와 학교로 들어오면 변수는 일어나서 샤워를 했다. 형은 자꾸 지..
부담 동생의 마음이 이해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나도 양아치였으니까. 그렇지만 나는 깨달아버린 것이다. 학교에 가지 않는 양아치보다는 학교에 가는 양아치가 더 멋있다는 사실을. 부모가 죽고 세 달이 흐르자, 숙제가 밀리면 그 숙제는 하지 않는다. 그것이 형의 방식. 형이라서 라면을 먹어, 역기도 들고, 찬송하고, 낮잠을 때리지. 형이라서, 형이라서 배탈이 났어요. 나는 학교에 늦게 간다. 하고 싶다면 너도 형을 해. 그러나 네가 형을 해도. 네가 죽으면 내 책임이지. 학교에서, 나는 농구하는 애. 담배 피우는 애. 의자로 후배를 때린 선배. 아버지가 엄마보다 늦게 죽을 줄 알았어. 자주 앓는 사람이 오래 사는 법이니까. 부모가 동시에 죽고, 이제 누가 화장실 청소를 하나? 형이라서 배탈이 났어요. 이십..
방관 부모가 죽고 세 달이 흐르자 형제는 화장실 청소를 할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샤워를 할 때마다 바닥에 오줌을 누는 동생, 치약 거품을 천장에 뱉는 형, 바닥은 노란색 천장엔 파란 얼룩, 형제는 일주일 전부터 소원해지기 시작했다. 형은 매일 아침 운동화를 닦고 테니스를 치러 나가네. 아마 역기도 서른 번씩 드는 모양이야. 형이 끈을 다 묶고 현관을 나설 때까지 나는 일부러 코 고는 소리를 낸다. 형, 잘난 형, 형은 기도문도 여럿 암송할 줄 알지? 형의 중얼거림은 언제나 새하얀 한 켤레 신비. 강해지고 싶어서, 나는 오늘도 학교에 가지 않았다. 성모상에 걸린 형의 묵주를 팔목에 치렁치렁 감고 방 안에 드러누우면. 어쩐지 생각이 많아지는 것 같아. 몸속 어딘가에서 힘이 솟는 것 같아. 커튼을 치..
개 먹을것이 아니라는 걸 알아채자 즉시 개는 초점에서 내 얼굴을 지우고 내 몸 뒤 끝없이 먼 곳을 철망과 담 산과 구름과 하늘 먹을것이 아닌 모든 것들을 뚫고 아득하고 깊은 곳을 바라보았다 세상은 너무나도 고요하고 깨끗하다 고막이 제거된 개의 눈 속에서 먹은 것은 남김없이 영양분이 된 영양분은 남김없이 살이 된 살은 다시 무언가 먹을 수 있다는 희망이 된 개의 눈 속에서 生老病死를 넘어 어디에선가 먹을것을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은 개의 눈 속에서
호랑이 길고 느린 하품과 게으른 표정 속에 숨어 있는 눈 풀잎을 스치는 바람과 발자국을 빈틈없이 잡아내는 귀 코앞을 지나가는 먹이를 보고도 호랑이는 움직이지 않는다 위장을 둘러싼 잠을 무거울수록 기분좋게 출렁거린다 정글은 잠의 수면 아래 굴절되어 푸른 꿈이 되어 있다 근육과 발톱을 부드럽게 덮고 있는 털은 줄무늬 굵은 결을 따라 들판으로 넓게 뻗어 있다 푹신한 털 위에서 뒹굴며 노는 크고 작은 먹이들 넓은 잎사귀를 흔들며 넘실거리는 밀림 그러나 멀지 않아 텅 빈 위장은 졸린 눈에서 광채를 발산시키리라 다리는 무거운 몸을 일으켜 어슬렁어슬렁 걷기 시작하리라 느린 걸음은 잔잔한 털 속에 굵은 뼈의 움직임을 가린 채 한번에 모아야 할 힘의 짧은 위치를 가늠하리라 빠른 다리와 예민한 더듬이를 뻣뻣하고 둔하게 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