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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da
등대가 있는 곳 위층에서 터진 물소리가 점점 커진다 그는 또 여자의 머리채를 잡고 노를 젓는다 여자의 몸이 방바닥을 휘젓는 소리 그릇들이 난파되는 소리 비명 소리 속으로 콸콸 물이 쏟아지고 있는 중이다 지난 오후 내내 베란다에 앉아 있던 여자의 흐느낌은 물소리였다 이내 길고 긴 골짜기가 되었다 붉은 화분이 하나 둘 흘러갔고 앞날을 모르고 웃고 있는 환한 사진들이 흘러갔다 불붙는 편지는 뒷걸음질치며 느리게 흘러갔고 우수수 머리카락이 흘러갈 때 멀리 먼바다의 문어대가리처럼 지던 태양은 먹물 같은 어둠을 갈겨버렸다 그때 첨벙첨벙 어둠을 밟으며 장화 신은 그가 온 것이다 늘 바다 비린내가 나는 그의 몸, 그는 거친 뱃사람인 거이다 그러나 한 번도 갑판에 올라본 적 없는 선장 토막나고 썩은 물고기들만 가득 싣고 ..

이번에 소개할 책은 한강의 '채식주의자'이다. 채식주의자는 세편의 중편소설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중 첫 번째 이야기를 여는 소설은 표제작인 '채식주의자'이다. 이후로는 2005년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몽고반점'과 '나무 불꽃'으로 구성된 소설이다. 따로따로 쓰인 소설들이었지만 이 소설들이 하나로 뭉치면서 한가 작가가 몇 년 전부터 해오고 싶었던 말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알 수 있는 한 권의 장편소설이 되었다. '채식주의자'는 제목 그대로 육식을 거부하는 영혜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소설이다. 이 책을 읽다보면 영혜의 과거 비슷한 장면이 짧게 나온다. 사실 '영혜'라는 인물은 한강 작가가 십여 년 전에 발표한 단편 '내 여자의 열매'에서 식물적 상상력이 극대화 한 인물이라고 한다. 그 단편 속에서 희망..

12회 청소년문학상을 수상한 페인트는 민감하다면 민감한 소재를 가지고 이야기를 써 내려갔다. 아이들이 부모를 면접하여 뽑는다는 것. '내가 이 부모 밑에서 자랐다면 어땠을까, 이런 부모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와 같은 사춘기 시절에 누구나 한 번쯤은 상상으로 품어왔을 소재를 이희영 작가는 책 속에 풀어 출간했다. 그리고 이런 민감하고 도발적인 소재라서 그런지 이희영 작가는 책 속에서 부모가 있는 아이의 입장과 부모가 없는 아이의 입장을 충돌시키면서 독자들에게 양측들을 보여준다. 어느 한쪽으로도 설득될 수 없고 만감이 교차하면서 페인트를 끝까지 읽은 나는 이 책에서 다뤄지는 부모의 소중함과 자식의 사랑에 대하여 생각하게 됐다.이처럼 청소년문학이지만 연령대를 초월하는 교훈을 가진 는 우리에게 '미래'라는 세..
얼굴의 물 그는 안에 있고 안이 좋고 그러나 안으로 빛이 들면 안개가 새 나간다는 심상이 생겨나고 그러니 밖으로 나가자 비는 내리고 비는 믿음이 가고 모든 맥락을 끊고 있어서 좋다고 그는 되뇌고 있다 그러면서 걸어가므로 젖은 얼굴이 보이고 젖은 눈이 보이고 비가 오면 사람들은 눈부터 젖어 든다고 그는 말하게 되고 그러자 그건 아무 말도 아닌 것 같아서 계속 드나들게 된다 얼굴의 물 안으로 얼굴의 물 밖으로 비는 계속 내리고 물은 차오르고 얼굴은 씻겨 나가 이제 보이지 않고
망상 해수욕장 서로의 얼굴에 모래성을 쌓는 해변의 연인. 파도는 전화벨처럼 밀려와 발자국을 밀어냈다. 나는 내 발자국으로부터 구명당하고 싶어 양손을 흔들었다. 파도를 걸어온 우리. 여전히 망망대해의 스티로폼보다 못한 우리. 그는 고무 튜브라서. 나는 불어도 불어도 부풀지 않는 튜브라서 우리는 가라앉지도 못했다. 우린 알록달록한 거대한 우산 아래 누워 햇빛을 피했다. 그가 쓰레기를 모아 기타를 퉁기며 쓰레기만도 못한 노래를 부르는 동안 나는 여전히 주둥이부터 꽂힌 빈 병처럼 그렇게 널브러져 있었다. 해변이란 모래알들이 알알이 모여 영원히 하나가 되지 못하는 곳. 손에 손잡고 아이엠그라운드를 외치면서도 이름은 끝까지 모르는 곳. 나는 망상이 신다 버린 슬리퍼 한 짝과 다정히 걸었다. 방차제 우뚝 솟은 자리부..
한때의 섬 밤마다 뒤척이는 소리를 듣는다 우리 집 침대는 외롭다 거대한 캔버스 죽은 맨드라미와 모빌 부싯돌처럼 서로의 머리가 깨지는 줄도 모르고 낡은 성냥갑에 갇혀 있는 자작나무 불길한 우리는 침묵했다 숲은 겨우내 거울 안에서 우거지고 있었다 반짝이는 야광별 순한 처마에 흐트러지는 빗방울 마주 본 등은 익숙하고 무서웠다 나는 쓸모없는 그림이 되었다
동거 내가 태어났는데 어쩌다 너도 태어났다. 하나에서 둘. 우리는 비좁은 유모차에 구겨 앉는다. 우리는 같은 고복을, 남자를, 방을 쓴다. 언니, 의사 선생님이 나 하고 싶은 대로 하래. 그러니까 언니, 나 이제 너라고 부를래. 사랑하니까 너라고 부를래. 사실 너 같은 건 언니도 아니지. 동생은 식칼로 사과를 깎으면서 말한다. 마지막 사과니까 남기면 죽어. 동생은 나를 향해 식칼을 들고, 사과를 깎는다. 바득바득 사과를 먹는다. 나는 동생의 팔목을 대신 그어 준다. 넌 배 속에 있을 때 무덤처럼 잠만 잤대. 한 번 더 동생의 팔목을 그었다. 자장자장. 넌 잘 때가 제일 예뻐. 동생을 뒤집어 놓고 재운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주고 재운다. 비좁다 비좁다 밤이. 하나에서 둘. 하나에서 둘.

아몬드라는 책은 사실 많은 독자들이 읽어봤을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이 책을 소개하는 이유는. 책을 사랑하는 더 많은 독자들이 라는 아름다운 책을 읽었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는 제10회 창비 청소년 문학상 수상작으로 와 같은 선상에 선 인정받는 작품이다. 작가 손원평은 제6회 영화평론상과 제5회 제주4.3평화문학상을 수상했다. 괴물이라 불리는 아이 의 주인공인 '윤재'는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소년이다. 감정이란 소재는 어떻게 보면 뻔한 딜레마를 불러일으킬 수 있지만 손원평 작가는 자신만의 문체로 감정이 없는 인물을 세세하고 조심스럽게 다루며 이야기를 흥미롭게 만들었다. 다른 사람의 감정에 공감을 하지 못하는 '윤재'는 엄마에게 감정을 교육받는다. 남이 웃으면 따라 웃고, 도움을 받으면 고맙다고 말하는..